[권의종의 경제프리즘] 부실 설계 고용정책과 혼란의 근로시간 단축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부실 설계 고용정책과 혼란의 근로시간 단축
  • 권의종
  • 승인 2018.06.1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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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처, 대책수립 때 방향 설정-개념 정의가 먼저...구체적 실행방안 마련은 그 다음 순위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어릴 적 기억은 오래도 간다. 주일학교 시절 배운 동요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반석위에 지은 집’이라는 노랫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고, 미련한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다. 비오고 바람불면 반석 위의 집은 끄떡없지만, 모래 위의 집은 무너지고 만다”는 줄거리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기본 충실’의 교훈이건만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은근과 끈기로 표상되는 한국인들에게도 기본 충실은 감당키 힘든 난제다. 그래서인지 사회 곳곳이 부실 투성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고쳐질 기미조차 안 보인다. 건축이나 토목공사 부실은 여전한 사회적 단골 이슈다. 지어진 지 30년 정도만 되면 어김없이 재건축이나 재개발 요구가 빗발친다. 한국 주거문화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부실로 인한 크고 작은 각종 재난사고들 또한 그칠 줄 모른다.

교육의 기본도 허술하다. 중고등학교는 졸업장을 따는 곳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학교 수업은 형식으로 흐르고 학원을 통해 입시 수업이 이루어지는 게 고작이다. 서울대 이공계 신입생의 절반에 가까이가 고등학교에서 물리Ⅱ를 이수도 않고 입학한다. 물리학 등 기초과학에 대한 준비가 허술한 상태로 대학에 와서 이공계 전공 수업을 따라가기 어렵다. 오죽하면 서울대 공대가 학생들에게 '물리학' 대신 '물리의 기본'을 가르치고 있을까.

산업의 기초도 부실하긴 마찬가지다. 정부가 2022년까지 35조원 이상을 투자해 1회 충전으로 500㎞ 이상 달릴 수 있는 전기자동차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기차의 경쟁력은 주행 가능한 최대 거리로서 이는 배터리 소재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도 배터리의 주 구성 원료인 탄산리튬, 황산코발트 등 원료들의 안정적 수급 체계에 대한 준비는 허술하다. 정보기술(IT) 산업의 강점만 믿고 호흡이 긴 소재원료 산업의 육성에는 정부의 관심이 덜하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기본 부실’로 몸살 중.. 내용도 확정 안 한 상태서 '주 52시간' 덜컥 책정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센서, 지능형 반도체 등을 구성하는 스마트 소재의 기술 선점은 필수적이다. 조립과 가공 기술이 세계적으로 평준화됨에 따라 소재 기술이 제품의 부가가치 증대와 미래시장 선점의 핵심 관건이다. 바이오·환경·에너지 산업 등 각종 첨단산업에서 소재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50~70%를 넘는다.

정책 생산에서도 기본이 잘 안 지켜진다. 7월부터 300인 이상 기업부터 시행되는 근로시간 단축이 특히 그렇다. 근로시간에 대한 개념 즉 기준을 먼저 정의하고 나서, 주당 근로시간을 결정하는 게 바른 순서였다. 근로시간에 포함되는 내용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52시간을 덜컥 책정한데서 사달이 났다. 앞뒤가 뒤바뀐 정책결정이 자초한 필연적 후폭풍이다. 고용노동부가 그간의 판례, 행정해석 등을 기초로 해 판단 기준과 사례를 내놓았지만 업계의 반응이 싸늘할 수밖에 없다.

시행을 코앞에 두고 내놓은 가이드라인치고는 원론적 수준에 그치고 있다. 내용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직장 내 회식은 원칙적으로 근로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업무상 지인과의 식사, 주말 골프 등 거래처 접대도 사용자 지시나 승인이 없으면 근로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업무 도중의 흡연·커피 시간 등은 근로시간으로 인정받는다. 사내 교육은 성희롱 예방 교육과 산업안전 교육 등 법정 교육과 사용자 지시에 따른 직무 교육 등은 근로시간에 포함되나, 권고 차원 교육은 근로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출장은 근로시간에 포함돼 하루 8시간 등 소정 근로시간으로 간주하거나, 노사 합의로 하루 10시간 등 필요한 시간으로 정할 수 있다. 해외 출장은 출입국 절차와 비행시간 등을 근로시간에 어느 정도로 반영할지 등은 노사 합의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작 애매한 사항은 노사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기업 반발, 산입범위 확대로 노동계 반대.. 모두가 '불만' 뿐인 최악의 국면

최저임금 인상도 기본에 충실치 못했다. 최저임금 인상률을 먼저 결정하고 나중에 산입 범위를 확대하다 보니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인한 기업들의 극심한 반발과, 정기상여금과 복리후생 수당 등의 최저임금 산입에 따른 노동계의 극렬한 반대는 어쩌면 예상된 결과였다. 사용자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비용부담 가중으로, 노동계는 산입범위 확대가 최저임금 인상 효과의 반감으로 느끼도록 정책이 부채질한 셈이 되고 말았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을 반길 사용자가 없고, 제도 개편으로 인해 최저임금 인상효과가 줄어드는 걸 기뻐할 노동자도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진 것은 정책의 선후 순위를 지키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안 겪어도 될 혼란을 겪고, 피할 수 있는 혼선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기 힘든 국면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서도 정부는 태도는 여유롭다. “지금은 제도개선에 따른 후속조치를 점검하고 원활한 현장 안착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한담(閑談)만 되풀이 중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정책에서 방향 설정과 개념 정의는 가장 먼저 하는 게 순리다. 구체적인 실행방안 마련은 그 다음 순위다. 쫓기다시피 정책을 만들다보면 앞뒤 순서가 뒤바뀌어 전체를 그르치기 쉽다.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못할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는 의외로 심대하다. 사상누각처럼 부실한 ‘모래 정책’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처럼 짜증만 난다.

필자 소개
권의종
(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겸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 호원대학교 무역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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