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고 재지정’ 보다 시급한 건 ‘일반고 살리기’
‘자사고 재지정’ 보다 시급한 건 ‘일반고 살리기’
  • 권의종
  • 승인 2019.07.1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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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대계 되어야 할 교육정책, 정권 따라 '오년지계(五年之計)'로 쪼그라지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

[권의종 칼럼] 이름은 일단 멋지고 봐야 한다. 저자들은 출간 직전까지 표지 제목을 고민한다. 내용을 다 읽고 나서 책을 구입하는 독자는 없다. 제목과 목차 정도를 대충 훑고 구매에 나선다. 상품이나 서비스도 브랜드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명품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까다로운 현대 소비자도 명품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고가에도 아까운 내색 없이 지갑을 연다.

정책에서도 명칭이 중요하다. 그래야 홍보가 수월하고 활용도가 높아진다. 튀는 제목에 목매는 이유다. 중소기업 지원제도 중에도 그런 게 눈에 띈다. ‘명문(名門) 장수기업 확인제도’다. 장기간 건실한 기업 운영으로 사회에 기여한 바 크고, 세대를 이어 지속 성장이 기대되는 중소·중견기업을 명문 장수기업으로 확인해주는 제도다.

업력이 45년 이상인 기업으로 경제적・사회적기여・혁신역량이 우수한 기업이 대상이다. 중견기업은 매출액이 3천억 원 미만인 경우에만 해당된다. 지원되는 혜택이 작지 않다. 명문 장수기업 확인서 발급, 현판 제작・부착, 생산제품에 마크 부착 등으로 홍보에 활용할 수 있다. 정부포상 우선 추천, 중소벤처기업부의 수출, 인력, 정책자금 등 사업 참여시 우대와 가점이 주어진다.

국가가 인정하는 명예로서, 사회적 존경, 대외 인지도 상승, 우수인력 유입 촉진, 매출 증대 등의 부수적 효과도 기대된다. ‘명문’의 명칭에 걸맞게 취지가 참신하고 실속도 짭짤하다. 명문을 알아보고 후한 대접을 하려는 중소벤처기업부의 세심함이 군계일학처럼 돋보인다. 우리만큼 중소기업 지원제도가 잘 돼있는 나라도 드물다는 얘기가 빈말이 아닌 듯싶다. 모든 정책이 그랬으면 좋으련만.

정책도 명칭이 중요...‘명문(名門) 장수기업 확인제도’, 멋진 명칭에 걸맞게 지원혜택도 짭짤

교육 분야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명문 중시’는커녕 ‘명문 무시’의 행태가 노골적이다. 자사고 재지정 논쟁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올해 재지정 평가 대상인 전국 자사고 24곳 중 46%인 11곳이 교육청에서 지정 취소 결정을 받은 상태다. 교육부장관의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18년째 자사고로 운영해온 명문교들이 일반고로 강제 전환될 위기에 몰려 있다.

이런 판국에 서울시교육감은 한술 더 떴다. 자사고와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의 전면 폐지를 제안했다. 교육청이 평가한 뒤 지정을 취소하는 현행의 ‘점진적 폐지’ 방식 대신, 초·중등 교육법령을 개정해 ‘모두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교육부가 관련법을 개정할 의지가 없다면 국가교육회의에서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할지 공론화를 진행하자고 나섰다.

자사고를 입시전문기관으로 매도하는 교육 당국의 태도가 경우에 안 맞는다. 자사고가 학생선발권과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활용, 입시전문기관의 역할에 매몰돼 왔다고 주장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대다수 일반고에서도 대입 준비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고마저도 폐지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게 맞다. 고교교육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합리적 근거도 없이 자사고 압박정책을 펼치는 건 온당치 못한 처사다.

일반고를 살리기 위해 자사고를 폐지하자는 의견도 억지스럽다. 자사고를 폐지한다고 일반고가 살아나고 사교육이 줄어들리 만무하다. 지난 날 명문고를 폐지해 얻은 게 무엇인가. 솔직히 하향평준화만 노정되지 않았던가. 진보성향 교육감들이 주창해 만든 혁신학교에서 기초학력 미달자가 속출하고 있다. 고교 서열화 해소를 통해 교육 불평등 해결을 도모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하다. 생각과 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항시 유념해야 한다.

인위적 차별도 안 되지만 결과적 우열은 인정해야...선거공약에 매몰돼 현장 외면하면 큰일

공론화 착상도 위험할 수 있다. 국민의 뜻을 내세워 정책을 의도대로 관철시키려 한다는 오해와 불신을 사기 쉽다. 지난해 대입 제도 개편 때 국가교육회의가 공론화 시민참여단 조사에서 1위였던 ‘정시 45%이상 확대’ 대신, 교육부 의도였던 ‘정시 30% 이상’을 권고했던 전례도 있었던 터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을 공론화에 붙이게 되면 혼란만 키우게 마련이다.

공론에 따를 게 있고 그렇지 않을 게 있다. 가령 서울대 폐지를 공론화에 붙일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안 봐도 답이 뻔하다. 교육정책의 기조에 획일적인 평등주의 색채가 강화되면서 인재 양성의 목표가 희미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세계가 인재 양성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마당에 우리만 거꾸로 갈 수 없는 노릇이다. 명문은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이 개선을 낳고 부단한 개선이 명문을 탄생시킨다.

인위적 차별은 안 되지만 결과적 우열은 인정해야 한다. 이를 죄악시하면 정체나 후진의 나락에 떨어진다.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면서 잠재력을 극대화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다양한 인재 양성을 위해 나름 잘 유지돼온 체제를 갑자기 흔들면 안 된다. 백년대계가 되어야 할 교육정책이 정권 따라 오년지계로 쪼그라지면 피해는 학생과 학부모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돌아간다.

자사고 재지정이나 폐지의 논란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할뿐더러 시기적으로도 부적절하다. 당장 시급한 과제는 일반고 살리기다. 여태껏 제구실을 못해온 공교육 탓에 사교육에 매달리는 열악한 일반고의 교육 여건부터 바로 잡는 게 급선무다. 앞선 자를 끌어내리는 하향평준화보다 뒤처진 자를 치켜세우는 상향평준화가 낫다. 선거공약에 매몰되어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면 큰일 날 수 있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겸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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