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三斯)와 발몽(發蒙)...움직임과 말과 얼굴빛을 바르게
삼사(三斯)와 발몽(發蒙)...움직임과 말과 얼굴빛을 바르게
  • 박종권
  • 승인 2021.08.1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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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 다산이 두 아들에게 숙제를 낸다. 힘써야 할 세가지 일을 제시하고는 그에 대한 잠언(箴言)을 지으라는 거다. 이름하여 ‘삼사잠(三斯箴)’이다.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하게 서고, 아무렇거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가지(動容貌, 出辭氣, 正顔色)에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유배지에서 편지를 썼다.

다산은 “이 세가지는 바로 난폭함과 거만함과 어긋남을 멀리하고 미더움을 가까이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것도 못하면서 다른 일에 힘쓴다면, 비록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고 재주가 있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결국은 발꿈치를 땅에 붙이고 바로 설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주서여패’라는 책도 만들도록 했는데, 입지(立志)부터 처세(處世), 숭절검(崇節儉), 원이단(遠異端)까지 12조를 제시했다. 율곡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본떴다. 격몽요결은 천자문을 갓 뗀 초학(初學)을 위한 책인데, “학문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일상생활을 마땅하게 해 나가는 것일 따름이다”는 생각으로 지었다. 다산의 의도 역시 “먼저 인간이 되거라”쯤이겠다.

그런데 ‘격몽(擊蒙)’의 뜻이 가볍지 않다. 여기에서 ‘몽(蒙)’은 단순히 사리에 어둡거나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다. 주역의 괘(卦) 이름으로 건(乾), 곤(坤), 둔(屯) 다음이 몽(蒙)이다. 주역학자 서대원씨는 “몽(蒙)은 어린아이의 교육을 뜻한다”고 해설한다.

몽(蒙)괘는 동몽(童蒙) 발몽(發蒙) 포몽(包蒙) 곤몽(困蒙) 격몽(擊蒙)의 다섯가지 교육형태를 제시한다. 동몽(童蒙)은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이자 순수한 도(道)의 경지로, 최고의 인격을 상징한다. 누구나 추구하는 목표이지만, 쉽게 도달할 수 없다. 태어날 때의 순수함을 유지하며 자연과 합일(合一)을 이뤘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니까. 조선시대 서당에서 천자문을 뗀 아이들이 배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책명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입신양명 공부는 꺾이면 곤경에

발몽(發蒙)은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한 공부를 뜻한다. 오늘날의 법조인과 행정관료, 나아가 권력자가 되는 길이다. 이른바 성공을 위한 공부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개인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부는 끝까지 길(吉)하지 못하고, 한창 좋은 시절이 지나가면 어렵고 곤경에 처한다(吝)고 한다.

포몽(包蒙)은 포용과 화합의 공부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출세에 어두워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보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우선하는 게 그나마 도(道)에 가깝다는 거다.

곤몽(困蒙)은 어렵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데 억지로 하는 공부이다. 컴퓨터가 흥미로운데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재미없는 법과대학을 거쳐 사법고시에 내몰리는 교육을 떠올리면 된다. 이런 공부는 당연히 고난(吝)의 길이다.

그래서 당장 실용성이 없더라도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매진하는 동몽(童蒙)이 길하다는 거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경지쯤일까. 순수하고 온전한 학문이 궁극의 깨달음으로 이끌지 않겠나.

격몽(擊蒙)은 현대의 의무교육이다. 어린아이들이 도적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 최소한의 기초교육이다.

대통령선거에 나선 이른바 잠룡(潛龍) 상당수가 발몽(發蒙)의 전형으로 보인다. 예컨대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발몽 이용형인(發蒙 利用刑人)’에 꼭 들어맞는다. 형인(刑人)은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이니 오늘날 판검사가 아닌가. 신분 상승과 출세로 한 때 잘 나갔지만, 이미 얻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결국 어렵고 곤란에 처한다(以往 吝)는 괘인데, 글쎄다.

다른 후보들도 이런저런 발몽(發蒙)과 곤몽(困蒙)에 시달린 기색이 완연하다. 포용과 화합의 포몽(包蒙)은 흔적도 안 보인다. 이들 모두가 다산이 권유한 삼사(三斯)에 마을을 쓰고,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유권자도 좀 버젓한 대통령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박 종 권
· 호서대학교 AI융합대학 교수
· 언론중재위원

· 저서
<청언백년>, 인문서원
<기자가 말하는 기자>, 부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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