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남의 에듀컬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 '그 꽃')
깨우침이란 '한 해'라는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한 해의 마루턱을 내려올 때 비로소 얻는 것이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는 "가장 큰 행복은 한 해의 마지막에서 지난 해의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족(自足)할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리 많지는 않을 성 싶은 것이 우리네 인생사인 것 같다.
'더 사랑할걸, 더 참을걸, 더 즐길걸.' 평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며 아쉬움들이 진하게 묻어난다. 생각해보면 이런 의미의 '걸걸걸'이 비단 이 세 가지 뿐이랴. 더 많이 나눌걸, 더 배려할걸, 더 많이 이해할걸, 더 잘 섬길걸, 더 자주 웃을걸, 더 친절할걸, 더 시간을 아끼며 살걸….
킴벨리 커버거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의 구절들처럼 진작에 알았더라면, 아니 일상에서 실천했더라면 뒤늦게 이럴걸, 저럴걸, 후회하는 일도 한결 적어질터인데.
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그리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똑같이 한 살씩 나이를 보태게 될 것이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다가 자고 나면 새로운 날을 맞는다. 삼백육십오일 큰 수레가 한바퀴 돌고 있다. 그 수레에 묻은 미움과 원한과 기쁨과 즐거움과 온갖 시름이 일곱 색깔 무지개가 되어 하늘을 수놓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나절 책을 읽고. 한나절은 좌선을 한다.' 생활에 쫒겨서 반성할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다면 지금이 해묵은 때를 털어내야 할 시간이다. 미운 마음, 섭섭한 일들에서 해방돼야 할 시간이다. 어지간한 욕심 쯤은 손해보는 셈치고 깨끗이 놓아야 할 때이다. 원수진 일 아직도 남아있으면 과감하게 물러설 일이다.
오는 새해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 오늘은 아주 멀리 뒤로 물러서고 싶다. 한 살 새롭게 먹는 만큼 한치만큼이라도 나의 삶이 성숙해지기를 바라서이다. 높이 날고, 멀리 보고, 깨끗하게,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싶은 것이다.
'꽃'은 내려갈 때 비로소 보인다. 욕망과 성공을 향해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가던 그 잘난 시절에는 결코 볼 수가 없다. 꽃은 행복이다. 기쁨이고, 희망이고, 노래요, 꿈이다. 무거운 짐을 벗고 탐욕도 내려놓고 쉴 때 꽃이 길섶 저만치서 조용히 웃는 모습이 보인다. 올라갈 때도 거기 있었다. 눈비가 오고 비바람이 불 때도 꽃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지나온 매 순간이 다 꽃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눈을 가졌었기에 흐드러진 그 꽃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를 못했을 뿐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사소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세밑이면 좋겠다. 한 해의 끝에서 몸과 마음이 추운 이웃을 챙기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한 해 동안 남의 마음에 박은 못, 내 몸에 박힌 못 뽑아내고 후련한 가슴, 맑은 머리로 새해를 맞아야겠다.
지난 한 해, 뜻하지 않게 시련을 겪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옴치고 뛸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이 거대한 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견디다 보면 삶은 재건된다'는 게 역사의 가르침이다.
백열전구에서부터 축음기까지 1,093건의 특허를 낸 에디슨은 거듭된 실패 끝에 발명품 하나를 만들어낸 것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단지 효과가 없는 1만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
베이브 루스가 30년간 714개의 홈런을 쳐 홈런왕에 오른 것도 1,330번의 삼진 아웃이란 시련이 뒷받침됐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나는 9,000번 이상 실투를 했다. 패한 경기도 300회나 된다. 그 덕분에 성공했다"고 회고했다.
내년도 만만치 않은 한 해가 예상된다. 우리에게 닥친 국내외 여건이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아서다. 그런 때일수록 저마다 선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고 맞서는 게 중요하다. 주어진 여건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서 견디다 보면 어김없이 봄은 온다.
양팔이 없고 다리에도 장애가 있는 스웨덴 가수 레나 마리아가 '인생은 모든 사람이 받은 큰 선물'이라고 감사해 하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며칠 후면 찾아올 임인(壬寅)년 새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새해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또하나 '행운의 선물'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제 곧 영원 속으로 사라질 2021년 신축(辛丑)년에도 '사랑'과 '감사'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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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석남 (mansc@naver.com)
- 극동대 교수
- 전 한국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 학장
- 전 서울미디어그룹 상무이사·편집국장
- 전 스포츠조선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