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그리고 가을이면 생각나는 것들
이태원 참사 그리고 가을이면 생각나는 것들
  • 이영미
  • 승인 2022.11.0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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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칼럼] 저렇게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 들을 보고 있자면 저마다 갖고 있을 가을 추억들, 그것들을 나도 몰래 꺼내놓게 된다.

찬 바람이 불면 우리 집은 커다란 우유 통을 준비했다. 어느 축산농가에서 얻어온 그 우유 통에 물을 담아 연탄보일러 위에 올려놓고 데워서 다시 수돗가로 가져오곤 했다. 그 우유통 속에 든 건 바로 온 가족이 씻을 더운물이었다.

무거운 우유통을 연탄보일러에서 꺼내 바닥으로 내렸다가 다시 수돗가로 가져오자면, 우유통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서 들고 옮기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언니랑 둘이 우유통을 들어 수돗가로 옮기면서, ‘으쌰, 으쌰’ 소리를 내야 해서 웃기도 했다.

어릴 때는 추운 날 그 물이 없으면 씻기도 양치도, 머리 감기도 힘들었다. 통이 여러 개 필요한 날이 있었는데 그 날은 우리가 목욕을 하는 날이었다. 찬물로 씻자니 몸서리가 쳐지도록 추위가 성큼 다가와버려 어린 나와 언니는 더운물 목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살림에 자주 목욕탕에 가는 집이 그렇게 많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좁은 거실에 수건을 깔고 고무통을 놓고 더운 물을 받아 주었다. 언니랑 내가 같이 들어가 목욕을 하면 그렇게 개운할 수 없었다. 11월이면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첫눈이 오던 시절이었다. 더운물 목욕과 세수를 시작하는 건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시작과 같은 것이었다.

가을을 알리는 또 다른 일은 가족과 이웃이 같이 하는 행사였다. 11월이 되면 가족은 물론 이웃들까지 같이 모여 김장을 했다. 달리 찬거리가 없었던 때, 모두 일곱 식구였던 우리 집은 무려 백 포기나 김장을 담가야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이웃집도 비슷했다. 마당에는 세 집이 김장을 하느라 배추 수백 포기를 쌓아놓고 앞서 내가 목욕을 했단 고무통에 양념을 담았다.

나와 언니는 세숫대야를 들고 양념을 나르고 다 된 포기를 마당 한 켠의 김장독으로 옮겼다. 그렇게 일을 도와야 보쌈을 한 입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장독에 묻는 건 아빠들과 아들들의 몫이었다. 옆집 오빠와 삼촌들이 아빠들을 도와 김장독을 땅에 묻었다. 그렇게 해야 한 겨울을 날 겨울 식량을 충분히 마련할 수가 있었다.

그 때는 우리 집 일곱 식구가 한 방에서 지냈었는데, 방 한 켠에 쌀자루를 쌓아놓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 겨울 먹을 쌀과 묻어 놓은 김칫독이 있어 겨울이 와도 마음이 든든하다고 했던 아빠 말씀이 떠올랐다.

가을은 짧았고 빨리 추워졌다. 11월이 되면 벌써 겨울 옷에 내복을 든든히 입어야 되고 교실에는 연통을 단 난로가 들어왔다. 등,하교를 하자면 손과 볼이 추위에 빨갛게 되던 시절이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동네 넓은 공터에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져 개장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한 옛날 시골의 이야기 같지만, 한 40년 전에는 도시에서도 비슷하게 있었던 일들이었다.

사진과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오래된 추억을 지금은 SNS의 알림이 대신한다. 작년 이맘때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 가서 가을의 경치를 물씬 느끼고 돌아왔다고 알려줬고, 그 전 이맘 때는 처음 이 집으로 이사를 왔었다.

더운 물이야 사계절 틀면 나오고, 김장독 대신 김치냉장고를 두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파트 창 밖을 물끄러미 볼 때면 빨갛고 노랗게 농익은 낙엽들이 바람에 날리면서 그 시절의 스산한 기억들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마냥 기뻐하며 즐길 수 없는 가을이 가고 있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갑작스레 터져버린 사건과 사고들은 또 우리의 뇌와 가슴을 찌르곤 한다.

사건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또 그 일에 몇 마디를 더 보태는 것도 의미 없다 여겨져 아기자기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이야기를 대신한다. 다시 한 번 가신 분들의 명복과 일의 조속한 해결을 바라고 또 바래 본다.

필자 소개

이영미<klavenda@naver.com>

동화작가/문화예술사

세종대학교 대학원 미디어컨텐츠 박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신문만화

전 명지전문대 글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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