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장서(巴里長書)...조선의 유생(儒生)들, 일본의 침탈을 성토하다
파리장서(巴里長書)...조선의 유생(儒生)들, 일본의 침탈을 성토하다
  • 곽진
  • 승인 2022.11.10 15:04
  • 댓글 0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곽진 칼럼] 500년 조선(朝鮮) 왕조가 유교가 지배했던 나라였음을 생각하면 놀랍게도 1919년의 3.1독립선언서에 유교 측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유림들이 입었을 내상은 크고 깊었음이 자명하다. 그 자괴감과 수치심이 유림들이 총의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합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수백 년 분열되어온 한국 유림이 학파의 벽을 허물고 국제회의에 한국민의 입장을 전달하자고 결의한 뒤, 전국 유림들의 뜻을 모아 총 2,674자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이하 장서(長書)로 약칭)”를 완성하였다. 이를 파리강화회의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 일본・중국을 포함한 각국 공관, 세계 주요 미디어와 국내의 각 서원에 발송함으로써 이른바 파리장서 사건이 발발,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우선 장서(長書)는, “인간이 강약(强弱)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강자는 약자의 생명을 위협하며 다른 나라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고 있다. 만약 ”천지의 본마음“을 새겨 천하가 대동(大同)으로 돌아간다면 만물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5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2천만 국민을 가진 한국이 결단코 일본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라는 줄거리이다.

파리장서의 중심 내용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인간계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 5천 년 역사를 지닌 한국이 일본 식민지화되는 과정,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림, 식민 통치 거짓 논리에 대한 경고,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해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장서는 유학의 기본 이념인 이(理)의 논리로 세계 인류의 보편적 양심 회복을 촉구한 운동이었다. 당시 시사에 민감한 유림들은 해묵은 당파다툼을 망국의 씨앗으로 판단하고 그 혁파가 나라를 구하는 길임을 절감했다. 나아가 실용(實用)과 실득(實得)과 동떨어진 학문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믿고 새로운 학문을 수용, 시무(時務)에 밝은 인재 양성을 시급한 과제로 삼았으며, 어느 당파에도 구속되지 않고 칠흑 같은 시대를 헤쳐나갈 이념으로 각 학파(學派)의 이(理)를 넓게 포섭하여 수용했다.

장서는 세계를 향한 이(理)의 구체적인 실천 행동이었다. 구미의 민족자결론(民族自決論)이나 국가주권론(國家主權論)에 기대지 않고 유학의 기본 철학인 도덕관에 기초한 생명 존중 사상이 그 중심이다. 즉 모든 민족과 국가는 자주독립의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논리로 제국주의를 추궁하고 세계 여론을 설득하려 하였다.

달리 말해 제국주의 대한 엄중한 질책이요, 반성을 촉구한 선언문이 바로 장서이며, 앞서 거론한 ‘천지의 본마음<天理>’, 즉 우주 상생의 기본 원리인 “이(理)”를 그들의 마음에 심어주려 했었던 것이다.

이(理)의 논리로 세계를 설득하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대명지조 대화지행(大明之照 大化之行)’이라는 글귀이다. 당시 보수 유림들의 척사의식(斥邪意識)으로 비춰볼 때 매우 파격적인 서양 인식 태도로 이는 중화주의의 철회를 의미한다.

장서가 3.1 독립선언과 비교해 그 지명도가 현저히 낮고 참여한 인물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분열했던 한국 유림의 환부를 치유한 점은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

앞에서 한국 유림들의 통합의 산물인 장서는, 기존의 학설들을 넓게 포용하여 해석한 “이(理)”가 절망의 시대를 넘어서려는 이념이었음을 강조했다. 즉, 기존의 질서나 체제를 정당화(正當化)・절대화(絶對化)하는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어두운 시대를 뚫어내려는 능동적인 에너지로 이(理)를 재인식했다는 것이다.

또한 무력투쟁-의병운동과 달리 세계의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하려 한 색다른 방식이었다. 그뿐 아니다. 강고한 당파의 벽을 허물고, 세계 언론을 활용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의식을 접고, 우주 상생의 원리인 이(理)의 논리로 서구 제국주의-열강들의 생각을 바꾸려 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결론적으로 20세기 파리장서(巴里長書)는 전통유학(傳統儒學)의 척사론(斥邪論)을 철회하고 민족(民族)의 독립논리(獨立論理)를 펼침으로써 우리 지성사(知性史)를 한 단계 높인 운동이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곽 진
 
. 상지대학교 명예교수
. (사)다산연구소 이사

. 저서
-
『김육연구』 (공), 태학사 - 『장현광연구』 (공), 태학사
- 『용산일고』 (역주) - 『창와집』 (역주) 등외 다수
 



 

 
Tag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서울이코미디어
  • 등록번호 : 서울 아 03055
  • 등록일자 : 2014-03-21
  • 제호 : 서울이코노미뉴스
  • 부회장 : 김명서
  • 대표·편집국장 : 박선화
  • 발행인·편집인 : 박미연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58, 1107호(여의도동, 삼도빌딩)
  • 발행일자 : 2014-04-16
  • 대표전화 : 02-3775-4176
  • 팩스 : 02-3775-41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연
  • 서울이코노미뉴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서울이코노미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eouleconews@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