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항례(敵國抗禮)와 국가간 외교의 안과 밖
적국항례(敵國抗禮)와 국가간 외교의 안과 밖
  • 김진균
  • 승인 2023.04.28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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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 칼럼] 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명나라에게 해마다 조공(朝貢)을 바치고 국왕 교체 때마다 책봉(冊封)을 받았는데, 이러한 외교를 사대(事大)라고 부른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된 뒤 조선왕조는 사대의 대상을 청나라로 바꾸었다.

조선왕조는 국내적으로 자주적 통치권을 확보하여 실질적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지만, 제국을 칭하는 중원의 거대국가를 보편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며 천하질서 안에서의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조선왕조는 천하질서 안에 포괄되는 일본 등 다른 개별 국가들과는 상호 공존의 외교를 펼쳤는데, 이를 교린(交隣)이라고 부른다. 교린의 대상이 되는 국가들과 맺는 외교적 의례를 적국항례(敵國抗禮)라고 하는데, 대등한 국가간의 평등한 예의라는 뜻이며 줄여서 적례(敵禮)라고도 한다.

근대적 외교는 보편적 적국항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청나라에 침투하고 조선왕조도 실질적 독립성을 상실해가던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천하질서의 중심을 차지하고 보편 제국이 되겠다는 야망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조선이 해외 각국에게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확인시키고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대한제국은 청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공사를 교환하는 등 청나라를 다른 외국과 형식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써 조선이 독립국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사대외교를 청산하고 모든 외국을 적례의 대상으로 전환함으로써 근대적 외교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 무렵 유길준(?吉濬, 1856~1914)은 「국권(國權)」이라는 글에서 국가의 주권을 두 방향으로 설명했다. “하나는 내용주권(內用主權)이다. 이는 그 나라의 일체 정치와 법제는 모두 그 나라의 전장(典章)에서 나온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는 외용주권(外用主權)이다. 독립평등한 예로서 다른 나라와 교섭을 지킨다는 것이다.”

주권은 국내적으로 법과 제도에 기반하고 있고 국제적으로 상호 존중 체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이다. 근대 국가의 주권이 국내 정치의 정당성과 국제 관계의 자주성이라는 두 방향을 모두 포괄해야 하는 개념임을 계몽사상가 유길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적 정당성과 대외적 자주성의 근대적 외교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이 식민지시기 조선인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기업에게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리자 일본 정부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 국가)에서 제외했고, 한국 정부도 맞받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고 나아가 지소미아(군사정보 포괄보호 협정)의 연장을 거절했었다. 상대국의 부당한 조치에 상응하는 적국항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23년 일본이 아무런 개선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대한민국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상응 조치를 모두 환원시켰다. 대통령 한 사람은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정치권의 환대를 받았지만 국민들은 굴욕감을 삼켜야 했다. 최근 미국 정보당국이 용산 대통령실을 도청한 사실이 확인된 상황에서도 대통령실은 유출된 정보가 상당부분 조작된 것이라며 도청은 아예 문제 삼지도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대통령 한 사람은 이번 주 미국을 방문하여 더 큰 환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국민들은 더 큰 굴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대한 도청 내용이 유출되자 대통령이 대놓고 러시아를 적대하였고, 갑자기 중국의 대만 정책에 반대한다고 인터뷰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더해 짐작해보면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대한민국을 위치지으려는 저의가 돌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미일과 대등하길 바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 위치를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국가들과 대립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러시아와 중국을 적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권은 대통령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정치적 합의라는 국내적 정당성과 상호 존중이라는 대외적 자주성을 결여한 상태에서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이 순간순간 돌발 표출되는 현상은 근대국가의 외교 행태에 미달하는 것이다. 외교의 파탄은 전쟁 위험의 고조로 이어진다. 조선왕조의 사대외교조차도 신중의 결과물이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적국항례의 원칙을 신중하게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김진균(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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