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명나라의 참전과 동맹의 허실
임진년, 명나라의 참전과 동맹의 허실
  • 김태희
  • 승인 2023.10.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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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칼럼] “염려할 것은 조선이 아니라 우리 나라(중국)의 강역입니다. 조선은 우리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우리가 토벌하든 않든 일본군은 침입해 올 것입니다. 일본군을 토벌하면 평양의 동쪽에서 견제하여 접근을 늦추고 화를 줄일 수 있지만, 토벌하지 않으면 평양 밖을 저희 멋대로 할 수 있게 해서 접근이 빠르고 화가 커질 것입니다. 또한 토벌을 속히 하면 우리가 조선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토벌이 늦어지면 일본이 조선 사람을 거느려 우리를 대적할 것입니다.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는 것을 한시도 늦춰서는 안됩니다.”

임진년(1592) 명나라 사신 설번(薛藩)이 조정의 병부에 보고한 내용을 일부 간추린 것이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9월 1일 기사 참조). 이때 중국(명)은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이른바 ‘울타리론’이 참전을 결정한 중국의 기본 입장이었다.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과 같은 의미다. 참전을 자칫 지체하면 조선이 일본 편이 되어 함께 중국을 공격하게 될 수 있다는 걱정도 주목된다. 이런 우려는 갑오년(1894)에 현실로 나타났다.

중국(명), 조선이 일본과 함께 공격할까 걱정하다

임진전쟁이 발발하기 1, 2년 전에 명나라 조정에서는 일본의 동향에 관한 첩보를 접수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미 유구(琉球)와 조선에게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며 협조를 강요하는 협박의 서신을 보냈다. 유구국은 이를 명나라에게 바로 알렸다. 그런데 조선은 알리지 않았다. 조선은 독자적으로 일본과 사신을 교환한 일이 명나라에 알려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조정에선 조선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마침내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상륙한 지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중국은 조선을 더욱 의심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군사적 강국인데 이토록 무력하게 무너지다니. 기실은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여 중국을 공격하는 게 아닐까?

어느새 일본은 평양까지 점령했다. 조선은 다급해졌다. 당초 꺼렸으나 태도를 바꿔 중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중국은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여 파병을 결정했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원칙적으로 개입하되 가능하면 협상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전쟁엔 돈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에 가까운 요동군을 파견하여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부득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지휘 장수 이여송이 의주에 도착했다. 병부의 원외랑이며 조선경략(조선문제를 담당하도록 마련한 중국 관리의 직함) 송응창의 참모인 유황상(劉黃裳)이 선조에게 대군의 당도를 알리며 서로 덕담을 나누다가 문득 물었다. “전하의 덕기(德器)로 어찌하여 일본군 침략의 환란을 겪게 되었습니까?” 선조가 답했다. “왜노(倭奴)들이 무도하여 상국(명)을 침범하려 하므로 조선이 대명 의리에 따라 배척했다가 그들을 성내게 만들어서 먼저 흉악한 침략을 당한 것입니다.” 뉴앙스가 묘하다.

사흘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유황상이 선조의 발언이 부당하다고 따졌다. 일본이 중국을 침범하려 했다면 절강 등지의 해안으로 침범할 수 있을 텐데 하필 조선을 경유했겠느냐. 어디까지나 조선이 침략을 받은 것이며 이에 황제가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한 것이다. 조선은 황제의 은혜에 감격함이 마땅할 따름이다. (<선조실록> 1593년 1월 3일과 6일 기사 참조) 중국은 자신의 이해득실 판단에 따라 파병을 하면서도, 명분상 대국이 소국을 살펴 은혜를 베푸는 모양새를 갖추길 바랐다.

중국과 일본, 각각 한반도 분할을 구상하다

이여송 군대가 드디어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벽제관 전투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하자 물러섰다. 이후 명나라 군대는 더 이상 전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강화협상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군이 한양을 내어주고 남하하는 성과는 거두었지만, 일본군은 남부해안 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일본군의 완전 퇴출을 바라는 조선으로선 답답할 노릇이었다. 전쟁 기간 내내 조선과 중국이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동맹관계라도 목표와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교착상태가 길어지면서 중국쪽에서는 서울 이북 지역을 중국이 직접 관리하자는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남해안으로 물러선 일본은 협상카드로 한강 이남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른바 ‘한반도 분할론’이 이미 이때에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참전에 대해 양쪽의 편향된 평가가 있다. 하나는 오로지 중국 덕분에 나라를 구했다는 주장이다. 선조의 정치적 계산에 부합한 논리였다. 이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이념으로 고착화되어 이후 유연한 사고를 저해하고, 청조 제국 질서 속에서 조선 지배층의 허위의식을 뒷받침했다. 다른 하나는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을 주로 부각하고 명나라 군대를 조연 정도로 보는 인식이다. 분명 중국도 삼국전쟁의 한 주체였다. 양쪽을 모두 아울러야 균형이 잡힐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가자지역에서도 전쟁 상태다. 세계의 어느 지역이라도 전쟁으로 고통받는다면 우리의 평화는 위협받을 수 있기에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당장은 한 발짝 물러서서 국제관계 내지 동맹관계를 바라볼 수 있겠다. 누가 피를 흘리고 누가 뒤에서 웃고 있는지. 우리는 역사 속 전쟁에서 배워야 한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글쓴이 / 김 태 희(역사연구자)
- 전
다산연구소장, 전 실학박물관장
- 저서 <실학의 숲에서 오늘을 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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