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정치의 계절...유권자의 책임과 역할
씁쓸한 정치의 계절...유권자의 책임과 역할
  • 윤영호
  • 승인 2023.12.0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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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치인도 유권자도 깨어날 때...정치인은 박수부대의 기계적인 반응에 속지 말고, 유권자도 정치인의 현란한 연기에 속지 말아야

[윤영호 칼럼] 선거날짜가 다가올수록 청치 권에서 오가는 언쟁은 상식과 이성을 잃은 ‘말 쓰레기’에 가깝다. 날로 그 빈도와 경박함의 강도가 더 심해지는 것을 보니, 홍역을 치러야 하는 총선, 정치의 계절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고통이나 불편함, 그리고 전전긍긍 고민해야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없었다면 인류문명은 진화할 수 없었음을 역사의 교훈으로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일시 불편한 쓴소리를 의연하게 소화하여 양약(良藥)으로 삼을만한 그릇과 소양이 보이지 않는다.

사후수습을 위해 어정쩡하게 사과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빈도가 잦은 것이 바로 그것의 반증이다. 패 갈린 정치권에서 쌈닭이 되어, 극한 투쟁하는 재미가 사라진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씁쓸한 정치의 계절이다.

아직도 연기 잘하고 바람몰이 잘하는 것이 정치능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유권자인 나의 수준을 말해주기도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과 같으니까 말이다.

나의 소중한 한 표가 무모한 바람에 쉽게 날라 가서야 되겠는가? 연기 잘하는 것이 능력인 것은 배우나 탤런트로 족하다. 사람 많이 모이는 것이 능력이라면 인기 연예인을 따를 자가 있는가? 그러기에 선거철에 인기 연예인을 함께 대동하여 유세하는 것 아닌가?

오늘날, 내 한 표가 누구에게도 압력 받지 않는 상태에서 비밀로 직접투표행사 할 수 있는 선거제도가 얼마나 소중한 지구촌 역사의 산물이고 살아있는 가치의 유산인지 음미해 보라. ’짐이 국가이고 왕이 나라님’ 이였던 절대왕정에서 주권재민의 수단으로 개인이 직접 정치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주국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 대가란 말인가?

만약 300년전에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외쳤다면 아마 역모죄로 죽임을 당했을 거다. 그 소중한 정치참여 권리를 선동과 편견의 바람에 쉽게 팔아 넘길수는 없다.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하게 상대를 저주하는 고착된 정치 대결구조

세습된 군주(君主)에서 민주(民主)로 권력이 전환되었다는 것은 유권자의 의사가 정치에 자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에 간접선거는 가짜다. 현혹된 선거도 가짜다.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선거는 더욱 가짜다.

이제 우리는 한 군주의 공포와 눈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주권자가 되었다면 또 다른 공포와 세뇌의 팬데믹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 자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진영의 연대(連帶)가 연좌(緣坐)로 변질되어 또다른 속박(束縛)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는 소위 ‘밴드왜건 효과’나 ‘언더독 효과’에서조차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밴드왜건 효과’는, 몰려든 대중을 보고 다시 모여들어 큰 흐름을 이루듯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에 편승하는 군중 심리 현상을 말한다.

반대로 '언더독 효과'는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로 인해, 싸움이나 선거에서 질 것 같은 사람이나 팀을 동정하는 현상을 말한다. 둘 다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세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소들이 분명하다. 의도되고 기울어진 질문문항에 의한 꼼수 설문조사도 만찬가지다. 민심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하게 상대를 저주하는 고착된 정치 대결구조다. 나 자신이 언제부터 대결정치에 올인하게 되었으며,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과연 객관적인가를 다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쓰러진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상투적인 정치의 변은 아직까지도 유효한가 보다.

쓰러진 것을 바로 세우겠다고 하는 당사자는 그것이 쓰러지는데 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세상을 비판하면서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던가? 내가 그동안 먹고 살아온 우물에 당당하게 침을 뱉을 수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기 바란다.

미혹한 인간이 벌이는 싸움은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아니다. 정의와 또 다른 정의와의 명분 싸움이라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엄밀히 내면을 볼 때, 누가 더 거짓을 진실처럼 설득시키느냐 하는 경쟁일 수도 있다.

이제 정치인도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네 편과 내편만이 있을 뿐

그동안 인류의 전쟁 역사를 보라. 가장 정의롭다고 표방하는 종교전쟁이 가장 정의롭지 못했다. 인간의 생명을 도외시한 정의는 정의가 될 수 없다. 결국 싸움의 핵심동인(核心動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권(利權)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싸움은 처음에 작은 생각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초기에는 옳고 그름을 표방하여 우군을 모은다. 그러나 세(勢)가 모이고 이권이 개입되면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네 편과 내편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은 마치 싸움닭과 같다. 인간이 부추기는 싸움에서 자신들이 왜 싸우는지조차 모른 채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 닭싸움이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도 유효한 때가 있다. 묻지 마 극단 지지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제 정치인도 유권자도 깨어날 때가 되었다. 정치인은 박수부대의 기계적인 반응에 속지 말고, 유권자도 정치인의 현란한 연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국민의 보편적 시각을 회복하라. 중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여야 정치인 모두가 적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경쟁자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있기 때문에 국민의 보편적 시각을 잃고 있다.

정치목적으로 표현된 이미지에서 그 이면이 함의((含意)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내가 섬세하면 시그널이 보인다. 모든 것이 메시지다. 보여주는 사람의 진심(眞心)과 보는 사람의 혜안(慧眼)이 부합되지 않는 한, 메시지는 물거품이다. 유권자가 차분하면 출마자도 차분할 수 밖에 없다. 유권자가 이성적이면 비이성적인 정치인은 설 땅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유권자의 책임과 역할이 크다 할 수 있다.

과거 우리의 기억에 생생했던 정치인도 결국 세상을 떠났고 그에 빌붙던 측근 유권자도 속절없이 모두 떠났다. 짧은 기간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의 삶의 가치는 자기 스스로에게 가장 정직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정치인이나 유권자나 공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을 속이는 연기나 그에 동조하는 남의 평가는 공허함만 남기는 한 때의 바람일 뿐이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무성했던 잎들도 결국, 정해진 자기 길을 따라 낮은 곳으로 내려 앉는 것이 순리다. 한때, 극성스러웠던 자신이라 할지라도 때를 따라 온유와 정직을 향하는 것이 시절의 교훈이다. 기한이 차면, 집착에서 벗어나는 낙엽을 통해 하늘의 뜻과 나의 생각을 합일하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소개

윤영호<yhy321321@gmail.com>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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