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테러는 가장 비겁한 범죄행위
기습테러는 가장 비겁한 범죄행위
  • 윤영호
  • 승인 2024.02.01 07:29
  • 댓글 0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치의 부작용이 증오와 어리석은 행동으로 표출된 것...기습테러에 대해서는 아무리 합리적 이유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어...온통 패 갈림 속에서 저주와 질투만 존재하는 정치구조의 세상이라면 이미 그 세상도 병든 세상

[윤영호 칼럼] 정치인에 대한 테러가 백주 대낮에 저질러졌다. 야당의 한 남성정치인은 칼에 찔렸고 여당의 한 여성 정치인은 돌로 맞았다. 피해자가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정치의 부작용(side effect)이 증오와 어리석은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기습테러에 대해서는 아무리 합리적 이유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범죄 후에 흔히들 정의로운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라고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자기 영웅화를 도모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

비겁한 방법으로 공포를 조장하는 것으로는 정의로운 가치를 구현할 수 없다. 그 행위 자체가 이미 정의와 떳떳함에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간 전쟁이 아니라 한 나라에서의 집단적 충돌이나 개인의 감정적 충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참’을 증명할 때 그 증명하는 과정 과정마다 ‘참’이 아닌 것이 섞여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픈된 링 안과 규칙안에서 하는 경기는 승자에게 금메달이 목에 걸리지만, 숨어서 하는 기습공격은 가해 범죄자에게 소위 은팔찌(수갑)가 손목에 채워지게 된다. 수단과 절차의 정당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과 사회 가치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고 진화한다. 과거에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촌 어느 지역의 일부다처(一夫多妻)제와 어느 특정지역의 일처다부(一妻多夫)제는 한 지구 위에서 지역에 따라 현재까지도 병존하고 있다.

한 때 지동설(地動說)에 배치되는 천동설(天動說)을 말하는 것 만으로 죽임을 당했던 웃지 못할 종교적 권위의 시대도 있었다. 그 때 암흑의 시대에 비교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집단적 안목이 그만큼 높아지고 이해의 지평이 그만큼 넓어진 세상으로 진화한 것이다.

포지티브 경쟁력이 부족한 정치집단일수록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무기로 삼아

다양한 환경과 변화에 대한 안목이 크면 클수록 상대적인 가치관을 이해하고 지협 적인 충돌을 수용할 수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면서도 발전의 기회를 상실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가치관도 얼마든지 함께 공유하면서 풍요와 합리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역사적 증거논리가 헤겔의 ‘정반합 원리(正反合 原理)’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세상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발전되어온 결과물이다. 이를 가속적으로 가능케한 정신적 토대가 바로 선진화된 민주 시민의식이다.

철천지 원수처럼 진영이 갈리고 세상을 온통 진흙탕 싸움터로 만드는 것의 실상과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치철학과 세상에 대한 가치관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의 이권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좁은 가치관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갈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며, 이런 정치팬덤 구조속에서 부화뇌동하는 대중의 맹목적 공격성 때문에 테러까지도 불사하는 대결구도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고, 이권은 명분 뒤에 숨어있음을 유권자는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겁한 행동의 왜곡된 정당성이 발을 붙일 수 없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실력과 명분, 즉 포지티브 경쟁력이 부족한 정치집단일수록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무기로 삼는다. 네거티브 전략이 효과를 보는 단세포적 감정 집단일수록 정정당당하지 못한 기습테러가 얼마나 비겁한 후진적 행동인지 모른 채 백주 대낮에 활개를 친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린 정치인이나, 묻지 마 추종자라면 사회의 안정과 공공복리를 증대시키는 일에 공헌할 수 없다. 목적과 수단을 구별하는 가늠추가 이미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한 테러를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면, 이 또한 정신적 공범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행동하는 양심’은 불의한 독재에 항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병들게 하는 편협한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암묵적 공포에 저항하는 것도 포함된다.

어떠한 이유라도 사람을 물리적으로 비겁하게 상해하는 범죄는 용납되지 않아

정신적 병리현상을 증폭시키는 생각을 추종하는 것에 대한 공범의식마저 없다면 이는 이미 부지불식간에 병든 집단이다. 특정 생각에 취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마약에 취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현실과 괴리된 환상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환자다. 인지부조화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특정한 누구의 사주를 받아서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세상이 온통 패 갈림 속에서 저주와 질투만 존재하는 정치구조의 세상이라면 이미 그 세상도 병든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는 왜곡된 신념의 독선과 방종하는 모방범죄가 만연되기 쉽다. 모방은 또 다른 모방을 낳기에 모방범죄일지라도 테러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와 다름없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이 결코 조화할 수 없다. 내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 보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이 될 수 있다.

어떠한 이유라도 사람을 물리적으로 비겁하게 상해하는 범죄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이 존귀하기 위해서 정치가 있는 것이지, 비천해지기 위해서 정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러 사람이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 선거제도가 있는 것이지, 특정인이니 특정집단만 행복하기 위해서 선거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사회가 진화하고 복잡해지면서 제도나 관습이나 추구하는 가치는 그 다양성을 더해가고 있다. 없던 가치가 생기기도 하고, 태양처럼 여겼던 기존가치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생멸하는 제도나 변화하는 가치의 중심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인간 생명존중이다.

이 만고불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최상위 목적이 되어야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 목적이 수단으로 변질되는 순간, 가치체계는 무너지고 그동안 유지하던 안전과 행복의 기본토대는 일순간 붕괴되고 말 것이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불 속으로 뛰어 들 수는 없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소개

윤영호<yhy321321@gmail.com>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서울이코미디어
  • 등록번호 : 서울 아 03055
  • 등록일자 : 2014-03-21
  • 제호 : 서울이코노미뉴스
  • 부회장 : 김명서
  • 대표·편집국장 : 박선화
  • 발행인·편집인 : 박미연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58, 1107호(여의도동, 삼도빌딩)
  • 발행일자 : 2014-04-16
  • 대표전화 : 02-3775-4176
  • 팩스 : 02-3775-41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연
  • 서울이코노미뉴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서울이코노미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eouleconews@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