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시즌, 성덕대왕이 생각난다
총선 시즌, 성덕대왕이 생각난다
  • 이도흠
  • 승인 2024.03.1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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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칼럼] 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모든 부문에서 심각한 퇴행을 하는 바람에 70%에 가까운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부정적이었다. 이렇게 좋은 구도임에도 민주당이 쇄신하지도, 좋은 정책을 제시하지도 않은 채 공천파동까지 일으킨 반면에, 윤석열 대통령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라는 공공의제를 강행했다.

이에 편승하여 국민의 힘의 지지율이 민주당을 역전했다. 하지만 두 정당 모두 보수정당으로 서민과 약자를 위한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불평등, 기후위기 극복 등 시대정신을 정책으로 담지 않고 있기에 누가 이기든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성덕대왕은 신라의 전륜성왕(불교의 이상적 군주)

그래서일까, 성덕대왕(聖德大王, 재위: 702년~737년)이 몹시 그립다. 유교의 정치에 대해서는 대중들도 잘 알지만 불교의 정치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잘 모른다. 성덕대왕은 전륜성왕이 되어 불교 이상국가를 신라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유교에서 이상적 군주가 요순(堯舜)임금이라면, 불교에서는 전륜성왕(轉輪聖王), 곧 아소카(Asoka)왕이다. 그는 인도를 통일하여 마우리아제국을 건설한 대신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였으나 불교에 귀의한 후에 철저히 부처님의 진리를 따르는 ‘다르마(dharma)의 정치’를 펼쳤다. 성덕대왕은 그를 따랐다.

“무기를 녹여서 보습으로!” 이 말에 정치의 이상이 함축되어 있지만 권력을 잡고서 이를 실천한 지도자는 인류 역사상 거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백제의 법왕, 신라의 법흥왕과 성덕왕이 이를 도모했고 성덕왕이 성공하였다. 성덕왕은 36년 동안 재위하면서 후대의 신라인들이 성군으로 칭송하고 경덕왕이 이를 기려 우리가 에밀레종으로 알고 있는 성덕대왕신종를 주조할 정도로 태평성대를 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성덕왕은 4년(705)에 모든 동물의 살생을 금하는 교서를 내리고 이어서 6년 뒤에는 가축의 도살마저 금하였다. 그는 불교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온 나라의 온 백성이 지켜야할 규범으로 세우고 실천한 것이다. 역기능이나 부작용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미물마저 죽이지 못하게 한 당시에 신라인들의 마음은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엄과 자비심으로 가득하였으리라.

토지개혁과 사회복지책 실시에, 주변국은 친선을

『장아함경』에서 붓다는 사람의 출신과 신분이 어떻든 중생은 모두 석가모니의 아들로 평등하다고 말한다. 성덕대왕은 21년(722)에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주었다. 대신 귀족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직급에 따라 벼를 주었다. 16세부터 57세까지는 정(丁)으로 분류하고 이들에게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부과한 당시의 체계로 볼 때 정에 해당하는 백성들에게 토지를 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귀족들이 극렬하게 저항하였을 터인데 성덕왕은 강력한 권위를 갖고 이를 단행했다.

『유마경』의 가르침대로 약자의 아픔을 자신의 병처럼 아파하는 자비심으로 그는 사회복지책도 실시하였다. 5년(705)에 흉년이 들자 나라의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고, 6년(706)에 재차 흉년이 들자 그 이듬해 정월부터 7월까지 일곱 달 동안 매일 백성들에게 한 가족 당 쌀 석 되씩 총 30만 500석을 나누어주었다. 17년(717)엔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왕이 직접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을 보면, “성덕대왕께서는 덕은 산하처럼 드높았고 명성은 해와 달처럼 높이 걸렸다. … 들에서는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는 함부로 물건을 남용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문재(文才)를 숭상하였다. … 한 해라도 전쟁을 하여 백성을 놀라게 한 적이 없었다. 사방의 이웃 나라와 먼 나라가 오로지 왕의 교화를 사모하는 마음만 있었지 일찍이 전쟁을 엿보는 일은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정치학과 철학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였는데, 그 수많은 정치인 가운데 왜 성덕왕과 비슷한 이조차 보이지 않는 것일까. 단 1명도 없는 것을 보면 개인의 탓은 아닌 듯한데, 그럼 교육의 탓인가, 문화의 탓인가, 그런 이를 거세하는 정치 탓인가, 모든 이를 물신과 탐욕의 노예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탓인가?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이도흠(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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